김석종|경향신문 상무이사
오래 전 서울 태평로 삼성주식회사(삼성그룹) 사옥에 한 스님이 찾아왔다. 이병철 회장을 만나겠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퇴근 시간이 다 된 이 회장이 할 수 없이 문을 열어줬다.
“스님이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십니까?”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은 회장님께 돈버는 비결을 배우고 싶어서 왔소. 내가 그 비결을 좀 배워서 모든 중생을 잘 살게 하려고 합니다.”
“하하하하…. 그래요?”
평소 잘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이회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 회장은 스님에게 저녁 식사까지 대접했다. 나중에 스님이 말했다.
“이 회장 돈 버는 비결은 도둑놈을 사람 만들어 쓰는 재주더군.”
평생 남다른 기행(奇行)과 거침없는 언행(言行), 혹독한 수행(修行)으로 살았던 성수 스님 이야기다. 스님은 “이병철 회장을 만나서 도둑놈 사람 만드는 재주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진리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성수 스님은 한때 신앙촌 박태선 장로, 통일교 문선명 목사의 집에 찾아가 함께 살기도 했다. 천주교 성당에서 신부, 수녀들과 똑같이 미사를 드리며 지낸 일도 있었다.
성수 스님이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쟁쟁한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한바탕 육박전에 가까운 ‘법거량’(선문답)을 벌인 일화는 수두룩하다.
그 성수 스님을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 황대선원에서 만났을 때다. 스님이 대뜸 고함을 쳤다. 대갈일성은 성수 스님의 주특기였다.
“그래, 주워 담을 그릇은 가지고 왔는가?”
“…………………”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야. 하루 밤낮 사이에 일만번 살고 일만번 죽는단 말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을 똑바로 볼 때는 살아있는 것이고, 한순간이라도 정신이 어름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거라. 이봐, 눈 뜨고 죽은 놈아!”
다짜고짜 ‘산송장’ 취급이다. 그러고는 껄껄껄 웃었다. 팔순 넘은 고령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목소리가 우렁찼다.
성수 스님의 이력은 화려하다.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같은 주요 사찰 주지를 했다. 불교신문사 사장, 총무원장, 전계대화상을 지냈다. 총무원장 시절 성철 스님을 종정에 추대했고,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런데도 큰 절의 조실 자리를 마다하고 자신이 직접 세운 황대선원과 서울 법수선원, 산청 해동선원 조실로 말년을 보냈다. 주로 황대선원에서 지내며 다른 선원을 오갔다.
황대선원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황석산 자락 함양 안의면 황대리 농촌마을에 있다. 절집이면 있게 마련인 일주문도 전각도 현판도 당호도 없다. 일반 농가 주택과 비슷한 벽돌집과 가건물 아홉 채를 법당, 선원, 요사채로 썼다.
스님이 머무는 조실채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조실채 한쪽에 토굴처럼 생긴 작은 선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날마다 홀로 참선한다고 했다. 출가 후 매일 새벽 3시 전에 일어나 예불과 참선하는 평생 일과를 한번도 거르지 않았단다. 식사는 한 끼에 딱 다섯 숟가락. 그래도 병원이나 약을 찾은 적이 없다고 했다.
“돋보기가 무슨 소용여. 이리 훤히 보이는데. 화내고 짜증내면 주름살 생기고 피도 탁해져. 생물은 관리를 잘 해야 돼. 일초도 늦추지 말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자기를 고치는 삶을 실천해야 해.”
성수 스님이 팔씨름을 하자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스님의 팔, 다리 알통이 젊은이보다 더 단단했다. 손과 얼굴을 내밀고 매끈한 피부 자랑도 했다.
“고찰(古刹)은 이제 정기가 다해서 새사람이 나질 않아. 난 새 땅에서 새로운 사자(불교의 위엄과 지혜의 상징)새끼를 키우겠다고 선원을 지은 거여. 살아있는 새끼사자를 기다리느라고 늙어도 늙은 척도 안하고 살지.”
성수 스님은 기존의 사찰이 올바른 수행 정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1960년대 말 통도사 극락암 경봉선사가 “명인(明人,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 도사가 쉽지 않고 흔치도 않다. 성수 자네가 그 결과를 해놔 봐라”고 했단다. 그때부터 “사람 만드는 공장”(선원)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님이 이끌었던 황대선원과 해동선원에는 생활원칙이 있다. 깨어 있는 동안 절대 눕지 말 것, 많이 먹지 말 것, 새벽 예불에 반드시 참여할 것, 휴지 한 장도 아낄 것, 잡기에 손대지 말 것. 겨울에 보일러도 때지 못하게 해 스님들과 참선하러 온 신자들이 냉기나 가실 정도의 선방에서 겨울을 났다. 그렇게 춥고 배고픈 데서 혹독하게 공부를 해야 ‘사자새끼’가 나온다는 거였다.
“세상에 사자새끼가 넘쳐 나야 돼. 뒤에 오는 사람이 앞질러가야 세상도 좋아지는 거여. 누군가 황석산 괴짜중의 ‘보따리’를 걷어찬다면 끌어않고 한바탕 덩실덩실 춤을 추겠네. 칼 들고 목 베러 오는 놈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산과 물이 도(道), 세상사가 선(禪)
젊어서는 스님 자신이 새끼사자로 살았다. 출가 동기부터 남달랐다. 어려서 동네 한학자에게 원효대사 이야기를 듣고 “나도 원효대사 같은 도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열아홉 살 때 원효대사 같은 도인을 찾아 집을 떠났다. 일 년 동안 유랑걸식을 하다가 “부산 범어사에 도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여기 도사가 있다는데 어디 한번 나와 보시오.”
법당 앞에 버티고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스님들이 몰려나와 청년을 끌어내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한 노스님이 나섰다.
“무슨 연유로 도사를 찾는고?”
“내가 원효대사 같은 도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고대광실 지어놓고 놀고먹는 중들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도들 시주로 먹고사는 스님들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기서도 도사를 못 만난다면 내가 절을 다 불 싸질러 버리겠습니다.”
성수 스님은 그때 이미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고대광실 지어놓고 놀고먹는 중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스님도 “참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네” 하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줬다. 그 노스님이 동산 스님이었다.
범어사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독학’으로 도인이 되리라 결심하고 천성산에 들어갔다. 내원사의 암자인 조계암에서 “일 년 동안 풀만 뜯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조계암의 성암 스님이 “도사가 되려면 글을 알아야 한다”고 타일러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게 됐고, 출가로 이어졌다. 나중에 성수 스님에게 계를 준 이가 바로 ‘범어사 도인’ 동산 스님이다.
성수 스님이 산청 지리산 자락의 폐교를 인수해 세운 원각사 해동선원은 불상 대신 ‘해동불’로 불렸던 원효상을 모셨다. 원효대사를 존경해 ‘도인’의 삶을 꿈꿨던 스님이 원효상에 예배하며 원효사상을 가르친 셈이 됐다.
“원효대사 말씀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만 진짜 가져가는 것은 내가 일생에 잘못한 업이라고 했어. 내(나)가 부처님보다도 소중한 존재여. 일초도 늦추지 말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자기를 고치는 삶을 실천해야 해.”
성수 스님은 토굴 생활을 많이 했다. 한 번 토굴에 들어가면 몇년씩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공부를 했다. 출가 초기 강원도 정선, 원효대사 수행처로 알려진 토굴에서 살았다. 3년 쯤 지났을 때 심마니를 만나서 뒤늦게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산에서 내려와 해인사에 갔다. 여기서도 스님 특유의 ‘괴짜행’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해인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스님의 기강이 세기로 유명한 절이다. 이 ‘햇중’에게 당연히 공양간(부엌) 일을 시켰다. 그런데 스님은 감히 고참들이나 갈 수 있는 선방에서 참선을 하겠다고 우겼다.
결국 당시 해인사 조실인 효봉 스님이 나섰다. 기가 막혔던지 ‘일주일 안에 도를 깨치지 못하면 주장자로 두들겨 맞고 쫓겨나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선방 입실을 허락했다. 기한을 지켜서 효봉 스님을 찾아갔다. “아직 멀었다”는 말을 듣고는 또 소리소리 질렀다.
“내 것이 도가 아니면 효봉 네 것을 내놔봐라!”
“이놈!”
효봉 스님의 고함에 탁, 떠오른 게 있었다.
“우주 만물이 선 아닌 게 없고(宇宙萬物 無非禪), 세상 만사가 도(道) 아닌 게 없다(世上萬事 無非道).”
이 선시(게송)는 훗날 ‘산과 물이 다 도(山水道), 세상 모든 게 선(世上禪)’이라는 말로 다듬어져 성수 스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이 됐다. 황대선원에는 ‘산수도’, ‘수시선’이라는 붓글씨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성수 스님은 1947년 성철 스님이 이끌었던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마지막 세대다. 그 시절 성철 스님이 “오직 일념(一念)만 하라”고 했다. 스님은 대뜸 “하고 많은 게 생각인데 어떻게 한 가지 생각만 하느냐”고 고함을 지르며 성철 스님의 멱살을 잡았다.
한번은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조용한 산중에 공부하러 왔나보네. 산속의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요?”
당대 최고수들 앞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던 스님이 산골 아주머니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시끄럽고 조용한 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문제다.
대인은 내 걱정, 소인은 남 걱정
성수 스님은 그 치열했던 젊은 날을 지나 어느덧 눈썹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모든 싸움을 마친 백전노장답게 인생을 달관한 연륜과 여유가 넘쳐났다.
“내가 오도독 오도독 재미나는 인생을 갈쳐주까? 매일 아침 첫 마디로 남을 상처주는 ‘송곳말’ 하지 말고 좋은 말로 시작해야 하는 거여. 몸을 움직일 때는 태산처럼 무겁게 걸어야 해. 또 하루 중에 단 오분이라도 부처님 흉내를 내서 앉아있어봐. 그래서 있는 복이라도 잘 관리를 하고 잘 쓰면 사는 재미가 오도독 오도독 나는 거지.”
사람들의 말이 험하고 자세가 바르지 못하니 개인의 몸과 마음이 아프고, 사회가 병들고, 정치가 어지럽다고 했다. 성수 스님은 항상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독창적인 법문을 했다.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계율에 대해서도 독특하게 풀이했다.
“생명을 죽이지 마라는 뜻이 다가 아녀. 죽지 마라, 즉 생사의 윤회에서 빠져나오라는 풀이가 부처님의 말씀에 더 가깝다고. 사람들이 파리 한마리 죽이는 것은 마음 아파 하지만 매일 제 목숨 죽는 것을 모르잖아. 제 목숨을 죽이지 마라, 그게 불상생이란 말여. 옛말에 대인(大人)은 자기 걱정에 여념이 없고 소인은 남의 일만 걱정한다 했어.”
스님은 이것만은 잊어서는 안된다며 “헛말 하지 말고, 헛일 하지 말고, 헛걸음 하지 마라. 남 탓 하지 말고, 나를 탓해라”고 여러차례 당부했다.
스님은 ‘이뭣고’ ‘똥막대기’ 같은 전통적인 화두를 내려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화두고 선이다(세상선). 각자 자기에게 가장 절실한 것, 그리고 죽고 사는 근본적인 문제가 화두라고 했다.
“마음에 부딪치는 모든 것, 나를 괴롭히는 일들을 모두 고마운 문수보살로 만들어야 하지. 자연은 때를 아는데 인간은 그러지를 못해. 자연을 봐. 날 때 나고, 클 때 크고, 꽃필 때 꽃피고, 열매 맺을 때 열매 맺고, 마침내 익어서 결실을 보잖아. 우리 인간은 60살이 돼도 익을 줄 모르기 때문에 늙어 썩어지고 버림받는 거라고.”
평생 ‘괴각승’(괴짜 스님)을 자처하며 한바탕 당당하고 멋지게 살았던 ‘황석산 대쪽’ 성수 스님은 2012년 4월15일 양산 통도사 관음암에서 열반의 길로 갔다. 세수 아흔 살, 출가 69년째였다.
⋯시방세계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
다 봐도 모자라는데
무엇이 그리 바쁜가!
눈을 떠도 그것이고 눈을 감아도 그것인데
볼 때는 내 것이고 안 볼 때는 남의 것이다.…
생전 “내면의 보석을 찾으라”고 말해온 성수 스님은 임종게에서도 “다른 것 다 버리고 보물을 찾아라”고 했다. 세상만사에 도(道, 보물)가 널려 있어도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 ‘내것’이란 내용이다. 임종게 마지막엔 “물이 흘러가니 바람이 불어오네(水去風來). 미소(哂)”라고 썼다.
성수 스님은 그렇게 웃으며 떠났다. 영결식이 열리는 영축산에 봄비가 쏟아졌다. 이날 자승 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이 말했다. “영축산 봄을 알리던 홍매화와 벚꽃도 하루아침에 그 꽃잎을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