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유형문화재
學士樓
학사루
김재웅 경남도의원은 함양군 지난 역사(歷史)와의 대화에 나섰다. 함양군청 길 건너에 ’학사루’가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 누각이다.
학사루라는 이름은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함양태수(咸陽太守)로 있을 때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학사루에는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비하인드스토리가 존재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현감(咸陽縣監)으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간신의 대명사 유자광(柳子光)의 시판(詩板)을 떼어내게 했다. 이 일로 유자광의 원한을 사게 된다. 그 후 김종직이 죽고 6년이 지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예전의 그 일이 불씨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학사루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왜구의 노략질에 의하여 관아와 함께 불탔으며, 조선 숙종 18년(1692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남도 제2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
김재웅 도의원(국민의힘, 함양)은 지난 12월14일 열린 제390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함양 학사루에 관련된 사항, 즉 다시말해 학사루 류(類)의 도지정문화재에 대한 경남도의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김 의원은 5분자유발언을 통해 “도내 산재한 유·무형의 소중한 도 지정 문화재를 보전·관리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행·재정적 지원으로 국가 문화재로 승격시켜 관광 자원 발굴과 다른 시·도와 차별화되고 특색있는 지역 문화 창달에 이바지해 달라”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김 의원은 이어 “타 시도는 지자체와 도민들이 합심하여 지방 문화재를 국가 문화재 승격에 온 행정력을 집중하는 데 비해, 경남은 역사적·문화적 자원이 우수한데도 지원과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도와 시 군이 유기적으로 협업하여 다양하고 효과적인 사업 추진과 홍보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특히 “함양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현재까지 1,200여년동안 명칭이 바뀌지 않고 현존하고 있으며, 3대 명군수(고운 최치원, 점필재 김종직, 연암 박지원)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서깊은 건축물”이라면서 “학사루처럼 도와 시군의 전폭적인 지원만 있다면 국가 문화재 지정이 유력한 도 지정 문화재가 내실있게 관리될수 있도록 꼼꼼하게 살피보겠다”라고 밝혔다.
함양군 어느 주막에서 김재웅 도의원을 만났다. “도의회 5분발언, 학사루를 내실(內實)있게 관리하자, 국가문화재로 승격하자, 아주 신선했습니다.”
“허허 감사합니다. 학사루는 우리 함양군이 대대손손 잘 관리해야 할 문화재입니다. 함양군청 출입하면서 여러번 학사루를 스쳐 바라보았는데, 건축물 속에 어떤 영성적 이미지가 담겨져 있는 것같더군요, 그래서 고전책을 통해 학사루와 관련된 비하인드스토리를 찾아봤더니 남다른 에피소드, 스토리텔링들이 가득합디다. 특히 점필재 영감과 관련된 눈물사연을 읽고 나선 눈시울이…오랜간 제 눈가에 맺혀 혼났습니다”
김재웅 도의원이 학사루 건너 함양초등학교에 있는 500여 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를 가리킨다. “바로 저 고목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현감 재임 시 심었지요. 김종직은 아들을 낳았는데 5살 어린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자 아들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느티나무를 심어 가꾸며 달랬다고 전해집니다.
(나무 크기는 높이 21m, 둘레 2.64m이고, 가지 길이는 동서(東西) 23m, 남북(南北) 26m이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서 임기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 마흔이 넘어 얻은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어버린다. 김종직의 시집 ’점필재집’ 에 실린 시 한수는 읽는 이를 마음 아프게 한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점필재 영감은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아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남기고 싶어 저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박성진 전 경북대학교 교수의 학사루 앞 느티나무 고찰론에 따르면, “이 나무에는 특별한 생김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나무의 뿌리목 가까이에는 마치 두꺼운 책을 옆으로 세워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보기 드문 모양새가 발달한다. 판자모양의 뿌리란 뜻으로 판근(板根, buttress root)이라 부르는 특수조직이다. 일부는 땅위로 나오고 나머지는 땅속에 들어가서 옆으로 퍼짐으로서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은 역할을 한다. 가로수에 버팀목을 해주는 것과 꼭 같은 효과를 나무가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원래 판근은 열대지방의 나무에 잘 나타난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땅이 무르고 흔한 태풍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판근 느티나무’는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의 아픔과 학문에 대한 소망을 오롯이 담아 놓은 듯하다.”
김재웅 도의원은 소박한 함양발전 로드맵을 갖고 있다. “학사루를 역사적 현장으로 만들고 싶다!”
다음은 김재웅 도의원의 말. “역사적인 우리 학사루가 현재 경남도 유형문화재 90호 지정에 그쳐 있습니다. 학사루보다 크기도 작고 역사적 가치도 낮다고 생각되는 무주 한풍루(寒風樓)의 경우 최근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요청으로 전북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지정되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거제에서도 거제현관아 객사였던 기성관(岐城館) 역시 올해 경남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지정되었는데요. 다시 말해 우리 함양에서도 이제 학사루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고 군민들의 뜻을 모아 학사루의 보물 승격을 이루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학사루에 적혀져 있는 주련을 읽었다.
七月蟬聲滿一樓 (칠월선성만일루) 登臨回顧叉償秋 (등임회고차상추) 長林上下高城出 (장림상하고성출) 大野東南二水流 (대야동남이수류) 學士已乘黃鶴去 (대야동남이수류) 行人空見白雲留 (행인공견백운류) 可憐風物今猶昔 (가련풍물금유석) 常有詩篇揭軒頭 (상유시편게헌두)
7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상하림 긴긴 숲에 성이 높이 솟았고 넓은 들의 동쪽과 남쪽에 두 냇물이 흐르네.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행인은 부질없이 흰구름만 바라보누나.
가련타 풍물은 예나 이제나 같은데 언제나 추녀 끝에는 시편만 걸려있네.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되길 기대
김 의원이 학사루와 관련된 또다른 야화를 들려준다.
“학사루의 마지막 중수가 있었던 1795년 안의현감을 지내고 있었던 연암 박지원이 당시 함양군수 윤광석의 부탁으로 쓴 함양군학사루기(咸陽郡學士褸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고을 사람들은 고운 선생을 사후 호칭인 최 문창후(崔 文昌候)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생전의 호칭인 학사(學士)로 불렀으며, 송덕비를 세우지 않고 오직 누각에 그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이 누각 안에서 서로 만날 듯이 여겼기 때문이다.>
“고운 선생에 대한 이와 같은 경모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함양 사람들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함양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보며 단일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건재 하는 학사루는 우리 지역을 다스렸던 최치원, 김종직, 박지원 3대 명환(名宦)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근현대 우리 함양의 교육을 책임졌던 함양초등학교와 함양군립도서관의 건물로서 교육도시 함양의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학사루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군민들의 하나 된 마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되길 기대합니다, 저역시 요로를 통해 학사루 업그레이드를 촉구할 것입니다“
이어 김재웅 도의원은 함양군 사근산성 답사에 나섰다.
함양군 수동면에 있다.
산성은 해발 443m 연화산(蓮花山)의 능선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연화산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3번국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라북도 남원으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방면과 전라북도 장수로 통하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방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김재웅 도의원의 말이다.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입지하였을 뿐 아니라, 동·남·서쪽의 세 방향이 남강(南江)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연의 요새로, 남해를 통해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죠.”
역사적 변천산성은 1380년(우왕 6)에 영남지방을 휩쓴 왜구들에게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과 감무 장군철(張群哲)이 혈전 끝에 함락된 뒤 조선 성종 때 보완하여 쌓았다고 한다. 그 뒤 왜구는 함양을 거쳐 단숨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다가 남원 인월역에서 이성계(李成桂)에게 격파되었다. 이 때에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두 장수와 사졸 500여 명이 이곳에서 전사하여 냇물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늦어도 고려 말에는 축성되어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동국여지승람』에는 “사근산성은 군의 동쪽 17리, 사근역 북쪽에 있다. 둘레가 2, 796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 안에 못이 세 군데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보다 오래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신라와 백제 사이의 분쟁지역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산성을 처음 쌓은 때는 6세기 중엽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내용성벽은 대부분 능선을 따라 바깥쪽 벽만에만 돌을 쌓는 편축(片築)의 방식으로 길고 네모난 돌을 ‘품(品)’자형으로 쌓았다.
다만 바닥 부분쪽에는 네모나거나 길고 네모난 다소 큰 돌을 쌓았던 반면, 위로 올라갈수록 얇고 길면서 네모난 돌과 두께가 넓은 돌을 일정한 규칙이 없이 번갈아 쌓기도 하였다.
“아마도 여러 차례 보완하거나 고쳐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평열을 맞추기 위한 1열 축조, 2열 축조 기법도 여러 곳에 남아 있지만, 2열 축조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5m 내외이고, 최대 잔존 높이는 4.4m 정도이다.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 돌더미로 쌓여 있거나 1m 안팎의 밑부분만 남아 있지만, 동북쪽 골짜기에는 원래의 모습을 갖춘 일부 성벽이 확인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봉우리들을 감싼 채 쌓여 각루, 치, 망대 등 특별한 시설이 없어도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성 안에서는 건물터와 문터가 확인되었고, 지름 14m 정도의 둥근 석축연못도 발견되었는데, 대체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아래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터는 남문만 명확하게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너비 2.5m, 길이 6m 정도이다. 산성의 정상부 쪽에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둥근 석축이 남아 있지만 성벽과는 다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은 물이 일정 정도 차면 넘치도록 일부 구간이 절개되어 있어 이채롭다. 산성 아래의 북쪽 물가에는 정여창(丁汝昌)을 향사(享祀)하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마안산성(馬鞍山城)이 가까이 보인다.특징발굴조사 결과, 성벽의 너비는 4∼9m로 편차가 매우 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지형에 따라서 편축에 의한 뒷채움 너비를 달리 했기 때문이다. 곧 능선의 암반에 쌓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폭이 좁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분은 너비가 넓다. 서쪽벽 일부에서는 길이 8m 정도로 바깥쪽 벽면의 받침 부분을 보강하여 쌓은 흔적도 확인되었다.
김재웅 의원 프로필
함양종합고등학교(현.제일고등학교) 졸업
진주농림전문학교 졸업
경상대학교 농과대학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진주산업대학교(현.경남과학기술대학교) 졸업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산업대학원 산림자원학과 농학석사
(前)함양읍농업경영인 회장
(前)법무부 갱생보호위원
(前)함양군농업경영인 연합회장
(前)위성초등학교 운영위원장
(前)함양읍체육회 이사
(前)함양군바르게살기 협의회 이사
(前)함양고등학교 학부모회장
(前)천령문화제 부위원장
(前)라이온스 355-J지구 회장
(前)자연보호 함양군 협의회회장
(前)함양군의회 의원(재선,4대 후반기 의장)
(前)함양농업협동조합 조합장(11,12대)
(現)가락(김해김씨.허씨.인천이씨)함양군 종친회 회장
(現)제11대 경상남도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