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 주상면 사무소앞에 표지석이 놓여져 있다.
큼직한 바위에 “왕사의 마을, 주상”이라는 글이 적혀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왕사(王師)란 신라말 고려초 불세출의 선승(禪僧) 희랑대사를 말한다.
희랑대사는 거창군 주상면 성기마을(희동) 태생이다.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나이 78세 때인 고려광종(7년) 966년 병인년에 입적하신 분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고려를 개국한 왕건의 복전 福田(복덕을 생성하는 근원, 왕의 정치적 스승)이었다.
스님은 당시 해인사 북악파의 종주(宗主)로 활동했다.
‘가야산 해인사 고적’ 사료에 “신라 말기에 승통 희랑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시면서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적에,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의 왕자 월광月光으로 더불어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왕건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건은 해인사에 들어와서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백제 월광이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지田地 오백결五百結을 드리니 스님은 옛 사우(寺宇)를 새로 중건하였다.”
합천 해인사에 스님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름하여 해인사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이 진영상(眞影像)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 조각이며, 국보 제3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쪽은 건칠기법으로 뒷쪽은 나무로 제작한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신재화 거창군의원과 주상면 성기리 희동마을 희랑대사 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희랑대사 생가터이다.
“마을이름이 왜 성기리냐? 성(聖)스러운 분이 태어난 터(基)라 해서 성기리입니다. 이 생가터는 천상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금학포란형(金鶴抱卵形)이외다. 천하길지지요. 이런 형국에는 풍(殺風), 수(避水), 화(火災)의 피해가 닿지 않소이다. 희랑대사가 화엄삼매에 들어가 화엄신장을 불렀다 하지 않고 합니다.
화엄신장 중에 금시조(金翅鳥)라는 새가 있습니다. 소설가 이문열의 소설 제목 중에 <금시조>가 있죠?
그 금시조인데, 금시조, 일명 묘시조라고도 하지요. 시(翅)는 금색으로 넓이 336만리요, 공중을 날아 수미산 아래 사는데 용을 잡아먹는 용맹한 새랍니다. 화엄신장 중에 긴나라왕도 있지요”
긴나라왕(緊那羅王). 음악신이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새인지 일정하지 않는데 노래하고 춤추는 괴물이다. “이 엄청난 종교적 판타지 스토리텔링을 보유하고 있는 희랑대사님이 우리 주상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재화 의원이 말한다.
“우리 주상면에는 희랑대사 외(外) 또하나 명소가 있습니다. 임실마을에 조선말 우국지사 이주환 열사 추모동상과 사당이 있습니다.”
“왜 마을 이름이 임실마을이지요?”
“임실마을은 연교리에 있습니다. 옛날, 임실마을에 지상곡면 사무소가 세워졌는데, 착실한 인심에 맡긴다는 뜻에서 임실(任實)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연교1구에 마을 가운데 도랑을 경계로 상임실(上任實), 하임실(下任實), 연교2구에 막터(幕基), 서잿골(書齋谷)등 4개 마을이 있습니다, 2006년 8월 14일 연교1구를 임실(任實)로 연교2구를 연교(連橋)로 변경 하였습니다.”
거창군 주상면 사무소 사이트에 따르면, 연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마을이 있다.
상임실(上任實), 하임실(下任實) : 300여년 전에 경주 김씨가 마을을 이루었다 하며 부자가 많이 산다고 "부석마"라고도 한다.
하임실(下任實) : 아래임실, "이음다리"라 한다. 막터(幕基), 서잿골(書齋谷) : 오무(내오산)의 청도 김씨들이 농막을 지었으므로 막터라 하고, 외오산(外鰲山)이라고도 한다.
서잿골(書齋谷) : 약 200년 전 경주김씨의 선조 원추, 극추, 근추 (元樞, 極樞, 謹樞) 세 형제가 시묘하던 자리에 서재를 짓고 임실에서 옮겨 살면서 마을이 생겼다.
다시 이주환 우국지사 스토리. 이주환 지사는 주상면 임실마을에서 선비로 평생 산 인물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합병되자, 거창의 이름난 유림인 이주환은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자신만의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자신이 내는 세금이 일제의 침략 행위에 사용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거창군수는 일본 경찰을 동원해 그를 붙잡았다. 세금을 내겠다고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는 거창군수 앞에서 이주환은 당당하게 말했다.
“세금을 낼 나라가 없는데, 어디에 세금을 내라는 것이오!”
일제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자 거창군수는 그의 손가락을 강제로 붙잡아 세금을 내겠다고 약속하는 문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화가 난 그는 집에 돌아
오자마자 지장을 찍은 손가락을 자르고, 이후로 술과 담배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술과 담배에 포함된 세금까지도 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1919년 고종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은 이주환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충과 효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유림에게 고종황제의 죽음은 충성의 대상이 사라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을 슬퍼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면사무소로 걸어갔다. 면 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에게 자신의 호적 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는 그것을 보자마자 찢어 버렸다. 앞서 일제를 향해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호적을 찢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백성이 아닌 대한제국의 백성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그는 거창읍에 있는 침류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창읍에 도착한 이주환은 침류정에 올라가 시를 적기 시작했다.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절세시 였다. 자신이 쓴 절세시를 읽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긴 이주환은 자결을 선택했다. 이주환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절세시
나라도 임금도 없는 외로운 백성
가련하게 통곡하는 가련한 정이로다
삼천리 강토가 비록 넓다고 하나
70 늙은이도 마음대로 못 다니는 걸
서산에 캐던 고사리 자주 눈에 푸르렀고
동녘에 솟은 달은 마음 밝게 비추는데
끝없는 이 통한을 어디 가서 호소하냐
죽어서 임금 모시기를 이생에 맹세하노라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에 한말 우국지사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 성암사(居昌 聖巖祠)가 있다. 송병선(1836∼1905)은 송시열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조선 후기 문인이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2월 국권을 빼앗긴 것을 통분하며 자결하였다.
송병순(1839∼1912)은 송병선의 동생으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문인들을 지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05년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로 독립운동을 강행하다가 1912년에는 순국할 것을 결심하고 음독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