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조광환기자


어젯밤에 어머니가 오셨다. “동한아, 술하고 원수졌냐? 아이고, 술을 올마나 많이 묵었길레, 몸을 못 가누노!”하면서 걸레를 집어들어 내가 누워있는 방바닥을 훔쳐댔다. 그리곤 방에서 나가 쌀독을 열어본다. “쌀은 많이 있구먼, 흐흐 옛날에 말이다, 아침 지을려고 양석 꺼내려고 광에 갔는데, 쌀둑바닥에 바가지를 닿을 때 아이고 쌀이 한톨도 없네, 우리 동한이 아침밥도 못먹이고 핵교보내야 겠네, 아이고 내 새끼 배고파 오째 핵교 갈꼬!”
어머니는 쌀독에서 쌀을 퍼내 밥을 짓는다. 어머니 젖가슴 같은 고봉밥을 상에 차려 가져왔다.
“묵어라 항거석 묵어라,”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듯이 사랑으로 밥을 올려놓은 고봉밥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말을 건냈다.
“그거 니 줄라고 평생 내가 모은 돈이다”
“어무이는 죽었는데 우찌 왔능교?”
“우치 오긴, 니보고 싶어서 왔제. 그래 소문에 의하면 니, 아직도 만날 술 마시고 고래고래 고함이나 지르고 그렇게 살아간다매, 화딱질 내지 마라, 그래 봐야 니만 손해다, 시금치씨 뿌린데 씨금치 나고 옥수수씨 뿌린대선 옥수수난다. 참한 마음으로 이웃들하고 잘 지내고 사는기 장땡이다. 니 얼골도 보고 밥도 해주었으니, 나 이제 마 갈란다. 잘 살아라”
나는 가려는 어머니 옷소매를 잡고 “어무이 내 할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후) 어무이 돌아가시고 어무이 방을 정돈하였는데예, 어무이 장농을 열어봤더니, 돈이 헝거석 있데에”
“그거 니 줄라고 평생 내가 모은 돈이다”
“압니다, 내, 그 돈 보고 그만 풀썩 주저앉아 펑펑 울어심니더. 서쪽으로 가라카몬 동쪽으로 가고 저산에 가서 땔감 해오이라 하몬 주막집에 가, 술이나 처묵고 청개구리마냥 불효저지른 나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줄라고”
어머니가 비시시 웃으며 “니 그 돈 가지고 모햇노? 술 처묵었제 흐흐”
“아입니더 아들하고 딸 주었심니더, 할매 돈이다. 잘쓰라 하몬서예”
“잘했다. 인자 마 나 갈란다”
하면서 어머니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머니(임갑선)는 평생 자식들 위해 모진 고생을 하며 살았다. 나는 아버지(밀양박씨 문하 박윤철) 얼굴도 모른다, 내 나이 3세때 아버지는 돌아갔다. 슬하에 4남매를 남겨두고선. 우리는 어릴적 거창읍상동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내, 초등하교 6학년 때 위천면 창말로 이사왔다. 초등학교6학년 1970년 당시는 생활도 궁핍하고 당시에는위천면 소재지의 텃세가 너무심해서 매일 싸움질 하느라 하루일과를 보냈고 나는 개인이고 동네 또래 아이들은 단체(5~6명) 이었다,당시에 힘이 좋아서 일대일은 이기지만 중간에 똘만이들이 끼어들어서 싸움은 지고 몸은 엉망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졸라서 다시 거창으로 돌아 갔다, 위천에서 생활은 중학교 1학년 이후에 시작 된다 . 어머니는 만날 산에 가 나물을 캐, 장에 가 팔았다. 어머니는 돈을 모으기 위해 누에를 치고 누룩을 빚고 두부도 만들어 팔았다.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 아들딸 네 마리를 겨우겨우 키워냈다.

중학교 생활은 안정문이 임판열이 강신철이 하고 매일 작을 골대 2개 만들고 운동장에
뛰어 다니는게 일과 였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아무런 것도 한게 없다. 위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작은형과 함께 부산에 가 공장 씨다(말단 노동)를 했다. 세신실업 양은냄비 만드는 공장이다. 첫월급 받아, 어머니 양말 속내의 사준 게 고작이다.
지난날을 기억하건데 어머니는 신기가 좀 있었다. 남편을 잃어 스트레스를 받어서일거다. 어머니는 종종 마을 사람 손가락을 따주곤 했다. 어머니 손은 약손이었다. 아픈 사람 병도 고쳐줘 사람들은 어무이를 “팔품행 보살”, “약손도사”라고 칭했다. 언제가 내가 복통으로 시달린 적이 있다. 어머니는 당신을 두 손으로 내 등를 탁탁 쳐주며 알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금은 내 곁을 떠난 아내를 보며 “아가 너, 몸에 신이 들어있는것같다, 그 놈의 신 神을 내쫓아 보내야 하는데 안 나가려고 안달이네, 우차몬 쓰겠노, 그 구신이 계속 니 몸에 들어 앉아 있으면 장차 니도, 우차야 쓸까 우차야 스까?”
어머니의 말은 나중 실제가 되었다. 아내가 그만 신들려 무속인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집에는 어머니가 그렇고 아내가 그렇게 무속집안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태백산으로 오대산으로 산기도 간다면서 자주 집을 비웠다, 그러다가 어느해 연락이 두절되어 현재에 이른다.
11월 14일 밤, 친구 조광환(지리산힐링신문 대표이사)이가 내 지난 날을 기사화 한다길레 그냥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위천면 거창식당에서 만났다.
조광환기자가 묻는다.
“자네 초등학교 6학년때 우리 학교(위천초등)에 전학 안왔나? 왜 위천에 왔나?”
“왜 오긴, 갈데가 없어 왔제, 울 엄마가 니도 알다시피 산꾼아이가, 산에 가 나물도 캐고 약초도 캐고 땔감도 만들어 시장에 내 안팔았나”
“기억난다, 너거 오머이 진짜 억척스런 여장부였지
-니 돌장사 해가지고 떼돈 벌었잖아?
”그랬지 군대 다녀와 노가다 열심히 해갖고 돈 모아 15톤 트럭등 차가5대나 사가꼬 돌장사 안했나,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좋은 돌 바위 구해 부자집에 내다 팔아 떼돈 펑펑 벌었지“
-그랬는데 와 망했노?
”사업이라는 기 만날 좋은 날만 있느게 아니지, 글세 직원놈이 대형사고를 내는 바람에 빚청산 한다고 트럭도 팔고 보상금도 주고 뭐 그래 가지고 거덜났지 하하하“
-폐가망신한 셈이네?
”그랬지 뭐, 그래도 한 때 남부럽지 않게 돈벌어 펑펑 쓰는 재미도 있었다“
-너희 엄마 돌아가시고 장롱에서 어무이 모은돈 보고 며칠 울었다며?
”허허 3박4일 울었다, 눈물이 그치질 않응거라, 평생 불효자로 후회하며 울었다 아이가,
이상하데 출상할때 눈물 한방울 안나디만 장농에 돈보고 미치겠더라
옛날 잘못한거만 생각나고. 지금은 참회하며 살아간다.
-지금와 생각하면 너희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
“응, 어느날 우리 옴마는 누런 금가락지를 끼고 있었지, 어느날 그걸 내가 봤는데 말라 비틀어진 손가락에 황소등짝처럼 누런 금가락지가 햇살에 빛나능거라 우리 엄마는 그 금가락지로 아픈 사람 병고쳐주곤 했는데, 그기 참 신기해 보이더라, 지금 생각하면 우리 엄마는 약보살이었더거라, 많은 사람 고쳐준, 그걸 난, 인정해!
마누라하고 어머니하고 고부 갈등은 없었나?
서로 너무 사이가 좋았다 질투 날 정도로
-친구야 너거 마누라 지금도 소식이 없나? (박동한 아내는 무속인이 된 후 집을 나갔다)
”전혀“
-너거 아들딸하고는 교신이 있을거 아이가?
”물어봤는데 전혀 없대“
-죽었나?
”처가집에서 그런 연락 안왔다, 그래서 살아있을끼라“
재미있는일이 있더라 군대에서 나는 사수고 부사수를(군에서3년간) 친한
동료를 수원에 노가다 할때 만났다, 이친구가 맥주 회사에서 고위직에
있어서 나를 맥주회사에 취직 시켜서 3년간 다녔는데 맥주 원없이 공짜로 묵었다.
나하고 술먹던 선배 후배 동년배 친구들은 전부 하늘에 별이 되었다
술에 도가 트여서 요즘은 술 조절이 된다 술주정을 자연히 안하게 되더라.
-요즘 들리는 소문에, 동한이 너, 새 여자 사귀고 있다며?
”사귀는 기 아이라 산다, 함께! 하하하“
-누군가?
”읍에서 분식집 한다, 참한 여자다, 그녀도 남편 없고 내도 여자 없고, 그래서 서로 의지하며 산다. 행복하게 잘 살끼다!“
나는 보기보다 카리스마가 있다 이젠 열심히 산다
분식집 매출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늦복이 있다.
.
”요즘 어무이가 자주 꿈에 날 찾아온다. 새 여자 사귀는 것도 알고 있더라, 어무이가 저승에서 축원해준다더라, 무슨 말이고 알긋나“
조기자는 허허 웃으며 ”글세 소설같은데? 친구야 너그 엄마 꿈에 또 오면 우리 어무이 장수해달고 축원 좀 해달라캐라“
”히모하모 해주투마“
우리는 밤늦게 신원막걸리에 수육을 먹으며 (박동한) 어머니 귀신 이야기를했다. 조광환 기자는 내 이야기를 메모하며 곧 기시화한다고 한다.
허허 이기 뭐 기사꺼리가 되나?
친구야 한잔 받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