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총선 산청함양거창합천 국회의원 무소속 후보, 신덕재 풀스토리
지리산힐링신문 대표 조광환
3. 사회생활
막노동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실업계 고교는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업을 하고 실습확인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학비만 내면 졸업이 되었다. 학업 성적이 상위권이면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일부 친구들과 주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급우들이 하나 둘씩 사회로 발걸음을 내딛을 즈음, 나도 먼 집안의 도움을 얻어 울주군 온산공단의 동해펄프 건설 현장에서 상업고교의 특성과는 전혀 무관한 막노동을 했다.
1979년 10월 18일 새벽, 울주군 온산행 완행버스를 타고 동해펄프 공사 현장에 도착한 나는 비가 오는 가운데 안전모를 쓰고 몽키를 들고 사회생활 첫날을 막노동으로 시작했다. 나는 그때 사회의 높은 벽을 비로소 실감했고 그동안 상상만 해왔던 현실의 고단함을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느끼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막노동을 해 보니 고단하기만 했다. 1980년 1월 3일 누군가의 시작 노트를 읽고 일기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나는 신음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입 밖으로 내어 버린 그 신음으로 인하여 더 큰 불행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노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비극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증언이라고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그 비극을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라고 떼를 쓰지도 않겠습니다.
오늘은 비가 옵니다. 저 비 때문에 가로수의 마른 잎들이 상당히 많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다른 계획이 진행될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질서입니다.“
1980년 1월 12일은 내가 다니던 거창상고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그리웠지만 이렇다 할 자리도 못 잡은 상태로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마음만 학교로 가고 몸은 집안의 신용갑 아저씨 건축 현장에 아버지 대신 나갔다가 오전만 일을 하고는 이래저래 심란하여 말없이 와 버렸다.
그렇게 막노동을 해서는 내가 원하는 꿈을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막노동 이라는 것이 직접 해 보니 몸도 마음도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이런 힘든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게 마음 아팠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가 너무 작게만 느껴졌다. 1980년 3월 7일에 쓴 짧은 일기 중에 ‘내 인생은 얼마든지 스스로 잘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앞으로는 우리 집안의 부정적인 사정을 내 자신과 결부시키지 않겠다.’ 는 내용이 있다.
그러고 보면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가슴 언저리에 한 켜 한 켜 쌓여 마치 인두로 지져놓은 상처처럼 각인된 채 차곡차곡 한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래서 좀처럼 아물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기억만으로 아픈 통증이 이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당시, 참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기다리고 참는 것,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살아야지 저러지는 말아야지, 등의 복잡한 생각들이 일기에 많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1980년 3월 19일 거창 작은 고모에게서 편지가 왔다. 용기를 잃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았다. 작은 고모는 아버지 형제분들 중에 유난히 인정이 많고 친정 식구들을 생각하는 분이셨다.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한 작은고모의 성원과 믿음은 지금까지도 어려울 때 용기를 내게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의 영원한 멘토, 어머니
고등학교를 나와 대기업 취업이나 농협공채시험에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빨리 자립하고 싶어서 하루가 바빴다. 학교만 나서면 뭐가 되도 쉽게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울산에 계신 부모님 곁으로 왔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동안 하시던 상점을 접고 막노동을 다니고 계셨다. 주로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는데 나도 부모님을 따라 나가 자연스럽게 막노동을 했다. 시골에서 농사일로 고생만 하시던 두 분이 하루 종일 어깨에 짐을 메고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번갈아 가며 오르내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께가 먹먹하게 아파 왔다. 한평생 고생만 하신 부모님이었다. 단 하루도 두 다리를 온전히 뻗고 주무신 적이 없으셨다. 호강이란 걸 그저 남의 얘기처럼만 여기던 분들이셨다.
고등학교 때 한번은 도시락을 싸 가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구랑 도시락을 나눠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빵을 사 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다. 나는 무엇 때문에 심통이 났던지 빵을 안 먹겠다며 어머니를 돌려보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서 방문을 열어 보니 낮에 어머니가 학교로 가져왔던 빵이 방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김치, 꽁치, 콩 반찬 등을 해놓으시고 방문은 열쇠가 없어서 열어 보지도 못하신 채 문틈으로 빵을 밀어 넣고 가신 것이었다. 마음이 찡했다.
학교를 떠나 기대했던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막노동 속에서 미래도 꿈도 모두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꿈꾸는 자수성가의 길은 너무나 요원해 보였고 하루하루 힘들게 지나가는 막노동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힘든 일과에서 벗어나고, 운명 같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서 가장 크고 깨끗한 인생의 거울이었다. 가장 강하고 완벽한 지지대요, 버팀목이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 있도록 지탱해 준 정신적 지주였다. 아무리 험난한 역경 앞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포기라는 말 자체를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자가 되겠다
1980년 6월 23일 부산에 계시는 작은아버지의 소개로 매일우유 사하보급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부산으로 내려와 우유보급소 소장을 만나 인사를 하고 다음 날부터 짐바리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했다. 그래도 막노동보다는 조금 나은 일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첫 출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얼핏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우유보급소로 달려가 사무실 바닥을 쓸고 있는데 경리 2명과 기사가 들어왔다.
사람도 낯설고 배달 일도 낯설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기사와 같이 배달을 다니다가 아침식사로 라면을 먹었다. 배가 고팠다가 먹는 아침식사라 꿀맛이었다.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나는 허기진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먹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식사는 끼니를 거르지 않고 때운다는 개념으로밖에 인식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팔은 멍이 들고 다리는 뻐근했다. 이런 일을 오래 하신 작은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즈음 세상은 결코 쉽지도 않으며 녹록하지도 않고 게다가 내 편도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힘들게 일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중압감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우유배달을 하기 위해 짐바리 자전거 위로 올라타면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신작로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발로 툭툭 차면서 걸었었지. 이젠 지난 세월이고 추억일 뿐이구나. 이젠 정말 앞만 보고 달려가자. 나는 이제 더 이상 장난스럽게 돌멩이 따위를 발로 차며 길을 걸을 수 있는 한가로운 초등학생이 아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놓인 무수한 돌멩이를 하나하나 걷어내며 개척해야 한다.’
우유보급소에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일하던 곳에서 배달된 우유와 빵을 먹다가 심장마비로 숨진 사람이 생겼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우유를 공급한 입장에서 도의적인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업적인 손해만을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소장을 보고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사람이 죽었다는데 눈앞의 이득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나는 그 사건을 지켜보며 굳은 결심을 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자가 되겠다.’
그 후 우유배달 일을 그만두고 울산으로 올라온 나는 어머니가 수소문을 해서 알선해 준 작은 공업사에 취직했다. 용접하는 것을 도와주고 쇠톱으로 지시한 길이대로 쇠 파이프를 잘라 주고 리어카에 연장을 싣고 아파트 공사 현장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공업사 일을 며칠 하지도 않았는데 일거리가 떨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데가 아니란 걸 또 한 번 실감했다. 그 뒤엔 여러 가지 잡부 일을 했다. 잡부 일이란 게 일용직이 대부분이어서 받기로 한 임금을 제대로 못 받아 속이 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울컥하는 심정에 울화가 치밀었다.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그 정당한 일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화가 났다. 막다른 골목,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해외 취업 얘기를 들었고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지금 하는 일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지구 끝 오지에서 일한다 해도 하루빨리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녹록치 않은 선택인지라 나는 그저 가난과 싸울 비장한, 그러나 아직은 아무 힘없는 굳은 다짐만을 거듭할 뿐이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이제부터란 다짐으로 나약한 회의를 버리고 힘차게 뛰어 보자. 비록 현실의 나는 누추하고 초라할망정 젊음의 밝은 미래와 찬란한 희망이 있지 않은가. 이글거리는 젊음을 밑천으로 성심껏 한 발 한 발을 내딛자.’ 라고
자신의 일은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나는 그 후 작은아버지가 100만 원을 도움 주신 것을 밑천으로 조그만 점포를 하시던 부모님 일을 도왔다. 이른 아침 어머니와 함께 상점에서 팔 과자를 도매해 오고 곧바로 역전 도매시장에 가서 과일을 구입했다. 도매시장 어귀에는 항상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들이 고무판을 땅바닥에 끌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세미를 팔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곤 했다.
‘저런 몸으로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러니 사람이 상황을 탓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는 것이다. 상황은 그저 주어진 여건일 뿐이다. 물론 그 여건이 좀 더 나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높고 낮음의 구분이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다. 더도 덜도 아닌 극복이 가능한 차이 말이다. 남보다 나쁜 상황이라 하더라도 디딤돌로 만들거나 걸림돌로 만드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머니와 내가 이른 새벽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점포 규모가 작고 위치가 좋지 않았던 탓에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과일을 리어카에 싣고 역전시장에 나가 팔아 볼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의 심리도 몰랐고 장사의 논리도 파악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81년 1월 29일 짐바리 자전거를 하나 사서 4만 5,000원어치의 비 메이커 과자를 달동문화원 근처에 있는 직매장에서 도매로 구입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겨우 상점 세 군데에 과자를 공급해 주고 1,500원을 벌었을 뿐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연쇄점에 원가로 과자를 공급하고 열흘 후쯤 수금을 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수입이 신통치 않았던 가게를 접고 생선 장사를 시작하셨다. 장사를 하면서 품목을 바꾸는 일은 가던 길을 바꿔 다른 길로 향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 시장조사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어려움들을 거뜬하게 아주 잘 헤쳐 나가셨다. 그즈음 나도 조금씩 장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 나름대로의 논리도 생겼고 이윤에 대한 방침도 생겼다.
어머니가 도매 수산시장에 나갈 때면 나도 동행했다. 어머니는 골목골목을 누비며 “갈치 사소.”를 외쳤다. 어머니의 그 다 쉬어 가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머니가 이고 다니는 저 ‘어머니의 갈치’가 얼른 다 팔리기만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래야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빨리 쉴 수 있으니까.
나는 나대로 주공아파트 단지에 들어가서 갈치를 팔았다. 처음에는 차마 갈치 사라는 말이 떨어지질 않아 아파트 동과 동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만 했다. 지나가며 묻는 아줌마들에게 겨우 몇 마리 팔고는 경비 아저씨한테 쫓겨났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창피했다.
아파트를 내려오는 길에 그래도 그냥 관둘 수는 없어서 겨우 입을 열어 “갈치 사세요,” 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더니 서 있던 아줌마들이 나를 쳐다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심사가 뒤틀린 채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져 갈치가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냥 그 길에 주저앉아 실컷 울고만 싶었다. 아니 가난을 깨트리고 싶었다.
다음 날 보통 자전거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짐바리 자전거를 2만 8,000원에 구입했다. 갈치 한 상자를 싣고 울산 병영이란 곳에 가서 마음을 다잡고 갈치 사요, 라고 외쳤다. 하지만 여전히 갈치 사라는 목소리는 마음먹은 대로 힘차게 나와 주질 않았다. 그러다 같은 연립주택 위층에 사시며 생선 장사를 하시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어 자리를 양보하고는 학성공원 뒤편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언제쯤이면 이 목소리가 창피를 뚫고 당당하게 나와 줄까, 싶었다. 그런 날이 와 줄 것 같지 않았다.
1981년 8월 30일 생선 장사 대신 어머니가 달동에 사는 어느 아주머니를 통해서 소개받은 두부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법적인 규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각 지역별로 두부시장이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서 두부공장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같은 업종을 하는 사업자 간 담합으로 그 지역 두부만 유통되는 것이 마치 불문율처럼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 즈음, 부산 두부공장과 양산 두부공장이 경쟁이 붙는 바람에 부산 두부가 시세보다 싸게 양산에 올라오고 있었다. 양산 통도사 근처 신평이라고 하는 곳에서 부산 공장 두부를 고무대야에 담아 언양을 거쳐 울산 공업탑 로터리로 와서 팔았다.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울산 곳곳을 누비고 다니시고 나는 운반을 했다.
그렇게 장사를 하던 어느 날, 공업탑 로터리에 도착해서 두부를 내리는데 울산 두부공장인 연식품 사람들이 시청 위생과 직원들과 함께 들이닥치더니 두부를 몽땅 압수해 갔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시청으로 달려가 위생과장을 만났다.
‘그만큼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다면 시장에 있는 파리, 모기도 다 잡으러 다니십시오.’
내가 거칠게 항의하니까 연식품 공장에서 압수한 두부 대금을 돌려주며 불법이니 외지 두부를 팔지 말라고 했다. 말로는 알았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나는 계속 두부를 판매했다.
두부를 파는 일이 생선을 파는 일보다 쉬웠다. 이른바 두부 판매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이다. ‘두부 사소, 두부요.’ 하면서 울산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생선보다 이윤이 많이 남았다. 이때쯤엔 물건 사라고 소리치는 일이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고 자주 가는 동네 사람들과는 얼굴도 익히게 되었다. 생전 못할 것만 같았던 그 일은 바로 내가 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도 편해졌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내가 할 일이다. 다른 누구도 내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신기한 건 변하려고 마음먹으면 진짜 변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면 된다.’는 진리를 터득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변하는 것은 변화해야 하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의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큰 변화는 바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의지만 앞서고 상황이 따라 주지 않을 때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그것이 나에겐 숙제였다.
두부를 팔지 않는 날은 다른 물건을 팔았다. 어머니와 울산 야음시장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밤을 팔았고 못다 판 밤은 동네로 가지고 가서 헐값에 팔았다. 그렇게라도 쉬지 않고 여러 가지 장사를 했지만 그래도 두부를 파는 날이 마음은 훨씬 더 편했다. 아마도 두부를 파는 일에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울산 연식품 두부공장과 부산 동화식품 두부공장이 협상을 해서 동화식품 두부가 신평에 오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신평으로 가 보았더니 소문과는 달리 부산 두부는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날 바로 두부 판매를 재개했다. 이전 방법으로는 경쟁력이 없을 것 같아 다른 방향으로 판로를 잡아 볼까 궁리하던 중에 소매도 하면서 정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식당이나 동네 작은 상점들을 단골로 잡았다.
사람을 믿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고등학교 때 학교 실습을 나온 이후로 동해펄프 공사 현장 막노동, 우유배달, 철공일, 원자력발전소 현장 잡부, 알루미늄 새시 창틀 일, 교회 종각 만드는 일, 과자 장사, 석유비축단지 잡부, 보일러 일, 갈치 장사, 두부 장사, 밤 장사, 번개탄 장사 등을 거쳤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어려운 일도 없었다. 쉽지 않은 것은 힘든 노동과 육체의 시달림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았던 것은 일이 힘들면 힘들수록 정신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하루도 기진맥진해지도록 힘껏 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도 가난을 원망하며 마음속으로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지낸 날이 헛되지 않았던지 1982년 5월 12일 내 통장에 처음으로 100만 원이 모였다. 통장을 베개맡에 두고 어찌나 기뻤던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돈이 아니라 내 피와 땀이 그곳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하여 10원짜리 하나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이때쯤 나는 인생, 가정, 고독, 행복, 희망, 신앙, 연애, 우정, 진리, 사랑, 결혼, 자녀 양육, 여자, 담배, 술, 죽음, 암시, 정, 사람, 생각, 편지, 경험, 흐름, 경쟁, 고향, 절망, 사랑의 병, 갈등, 자유, 음양, 마음, 환상, 승부, 화, 고민, 오늘 등에 대해 나름의 고민을 하며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젠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6월 28일 보충역인 방위소집 영장이 나왔고 나는 두부 파는 일을 서서히 어머니에게 맡기고 7월 18일 고향 거창으로 내려왔다. 짐 정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동안 써왔던 일기를 모두 꺼내 들었다. 죽을 만큼 가난이 싫어서 그 가난과 어떻게든 맞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것도 힘에 부치면 부여잡았던 일기였다. 걸핏하면 큰소리가 나는 집이 싫어서 그럴 때마다 위안을 삼으려고 붙잡고 썼던 일기였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소중한 기록이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써 온 일기 11권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만 끊어내고 싶었다. 지난하고 괴로운 허기진 과거와는 영원히 단절되고 싶어서였다. 그만큼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심한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7월 23일 창원에 있는 39사단 2637부대 1중대 1소대 2내무반 소속으로 3주간의 신병 훈련을 받고 8월 14일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다. 훈련소 입소 첫날은 주산을 할 줄 안다고 차출되어 행정반에 가서 훈련병들이 입소할 때 지참해 온 돈을 계산했다.
보충역 방위로 근무하면서 어머니를 도와 계속 두부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힘에 부치시는 어머니를 도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음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알게 된 아줌마의 남편 이헌명 씨를 기사로 채용해서 어머니를 도와 두부 장사를 하게 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내가 사업을 하면서 최초로 한 사장 노릇인 셈이었다. 임금을 받기만 하다가 난생 처음 기사에게 월급이란 것을 지급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야 드디어 일다운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즈음 아버지도 어머니를 도와 시장에 나가서 배달도 하고 남은 두부를 팔고 오시기도 했다.
몇 달 일을 착실히 하던 기사가 어느 날부터 수금한 돈을 입금시키지 않고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바람에 해고를 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비리였고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원을 고용하면서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의 성격과 인간성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게 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지 알았다.
1983년 9월 25일, 방위소집을 마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때가 학교를 떠나 비슷한 또래의 사람을 가장 많이 접하고 사귄 시기였다. 방위라는 신분은 군인이면서 민간인인 관계로 고참이나 전우애보다는 선후배나 포근한 인간애가 앞섰었다. 집에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엄격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사를 하면서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여정 하나를 내 인생에 보탠 것이다.
보충역 소집이 해제되고 나서 나는 내 미래와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대학 진학도 생각하게 되었고 장사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생각했었다. 불확실한 내 인생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든지 피하지 않고 부딪혔다. 두부, 만두, 햄 소시지, 음료, 수산물, 포장육고기, 배추를 비롯한 채소, 수박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쉼 없이 혼자만의 장사를 했다.
시련이라고 부르는 희망들
의욕적으로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세상은 준비 없이 마음만 앞서서 내달리는 나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새로운 품목을 판매하다가 두부 판매로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두부는 어머니 혼자서 리어카로 울산 남구 일대를 하루 종일 돌며 상점으로 식당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던 일이 신통치 않으면 곧바로 두부 판매 일을 하곤 했었다. 울산시청 복지과 직원이 어머니를 찾아서 만났는데 나이 드신 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가족도 없이 생계가 곤란한 분 같다고 하며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면 생계보조금을 준다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몹시도 씁쓸하고 미안하고 멍한 기분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내가 어찌해 드릴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이때 어머니가 당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그러한 고생을 피하셨다면 오늘의 내 자리는 전혀 형태가 달랐을 것이다. 실속 없는 장사를 무모하게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적당하게 안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서 지금껏 가난의 궁핍으로 허기진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빨리 경제적 자립을 꿈꾸며 동분서주하다가 우연히 뉴-서울만두 대리점을 하게 되었고, 무리하게 확장하다 화를 자초하여 급기야는 교통사고를 내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귀영화를 꿈꾸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만 경험 부족과 섣부른 판단과 주변 여건의 미비로 돌부리에 걸려 엎어진 것이었다. 난생처음 실패를 인정하고 삭발을 한 후 방향 전환을 모색하였다. 실의의 날들도 잠시,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직장생활을 1년 남짓 하게 되었다. 혼자 하던 자영업처럼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느긋한 직장생활이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결혼을 했다.
1986년 11월 장사를 하다가 알게 된 송화순 누나의 소개로 부친 이중상, 모친 홍말연 여사의 5남 3녀 중 막내딸인 이명숙을 만났고 이듬해 2월 22일 결혼을 했다. 내 나이 27세, 아내인 이명숙의 나이 23세 때였다. 인연은 그렇게 한순간에 찾아왔다.
1987년 11월 22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아이를 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태어난 지 1주일 만인 11월 29일 울산동강종합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딸아이가 하늘로 가기 직전, 나는 의사로부터 아내가 먹은 감기약 때문에 아이가 이상할 수도 있으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의 얼굴은 몹시 담담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는 하늘이 노래졌다. 병원을 나와 무작정 집 근처 교회로 달려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나는 그저 신에게 매달리는 일밖에 다른 할 일이 없었다.
‘하나님!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간절하게 소원하건데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은 견딜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고 하는데 저는 지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살아서 이런 벌을 내리신 거라면 착하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정말 바르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기도와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첫아이는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죽음이란 것,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해 봤던 그 죽음이란 것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내 자식의 죽음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아내가 있는 울산시청 앞 은하아파트로 갔다.
“이 아이는 우리와 인연이 아니었나 봐.”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내를 위로했다.
위로랍시고 한 말은 아이가 하늘나라에 간 소식이었다. 부모의 심정을 알려면 자식을 낳아 보라고 했던가. 아내는 대성통곡을 하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나도 울었다. 이승에서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간 가여운 아이를 생각하며….
아이는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부부 곁을 떠났다. 나도 나지만 아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 커서 한동안 말도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갔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미뤄 왔던 종합검진을 받았다. 늘 신경이 쓰이던 편도선 수술도 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10년 가까이 적지 않은 양의 담배를 피우다가 하루아침에 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숱한 가시밭길을 만나게 될 텐데 이까짓 담배 하나를 끊지 못하고서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에 결심을 하고 금연을 실행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1987년 12월,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인 고려가스 구암주유소에 사표를 냈다. 열심히 일했고 나름대로 보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틀에 박힌 직장생활로는 성공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 내 힘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자영업 쪽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어머니가 하고 계시던 두부 장사를 넘겨받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즈음, 아내는 두 번째 임신에서 유산을 하고 말았다. 처음이 아니라 아픔이 좀 덜하겠지, 했지만 여전히 아내는 실의에 빠져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지켜보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것밖에 해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시간을 아내와 같이 있어 주지 못해 언제나 미안했다.
두부 장사의 수입이 안정적이긴 했지만 틀에 박힌 기계적인 일이고 명절을 빼고는 일이 적든 많든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일도 고달프고 삶도 고달픈 시절이었다. 뭔가 다른 길이 없을까, 찾다가 서울 서초동 진로백화점 가구 코너에 갔는데 그곳에서 ‘한목’이라는 조립식 인테리어 가구를 보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울산으로 내려와서 살고 있던 아파트를 1,650만 원에 팔았다. 그리고 신정시장 옆에 작은 점포를 얻어 ‘한목’ 조립식 가구 대리점을 차렸다.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었다. 아내가 가게를 보고 나는 판매한 물건을 배달해 주며 6개월 정도를 운영했는데 부부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생각 차이로 인한 의견 대립이 자주 생겼다. 그때 나는 앞으로 사업을 하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아내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그런 결심을 아내에게 밝혔고 이후 아내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콩나물 판촉 지원을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하는 일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함께 일하는 직원이 몇 명인지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모를 만큼 가정과 회사를 분명하게 구분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6개월 남짓 기를 쓰고 했던 ‘한목’ 가구 대리점도 시행착오로 끝났다. 나는 대리점을 정리하고 다시 어머니가 하고 계시던 두부 장사를 했다.
울산 야음동 도로변의 작은 아파트를 1,550만 원에 구입하게 되었는데 50만 원이 부족하여 아버지께 모자라는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돈이 부족하면 사지 마라.”는 말씀이 전부셨다. 몹시 섭섭했다. 하지만 평생 누구한테 돈을 빌리지도 빌려 주지도 않는 아버지의 그 깐깐하신 성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에게 독립심을 갖게 해주었고 그 결과 어떤 경우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힘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