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파평윤씨 居昌入鄕祖 윤자선 “거창 입향” 전말기

- 성씨의 고향을 찾아서 제1부 - 합천 묵와고가(黙窩古家)∼거창 남하면 현지취재 - 취재사진 백년커뮤니티 김정호 사무국장

2023-05-01     지리산힐링신문

사단법인 백년커뮤니티(이사장 윤형묵)는 전승문화발굴, 조사연구, 보존 등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그 첫번째 사업으로 “성씨의 고향을 찾아서”를 기획했다. 제1부 “파형윤씨 거창입향조 윤자선”을 시작으로 5부에 걸쳐 연재하려고 한다.

(사)백년커뮤니티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비영리법인의 설립 및 감독에 관한 규칙에 따라 지역문화의 계발연구, 조사 및 문화진흥과 교육활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종임금의 큰아들 문종은 병약하여 단명했다. 이로써 문종의 어린아들 단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에 1453년 세종임금의 아들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킨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핵심지지세력 우의정 김종서, 수양대군 동생 안평대군 등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조카 단종을 강원도 영월군으로 귀양 보낸다, 이어 사약을 내려 죽인다.

이 사건을 가리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계류정난 후폭풍은 계속 일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등을 죽인다. 계유정난 당시, 파평윤씨 윤장(尹將)에게도 화가 미쳐들기 시작했다.

윤장은 김종서 당질서(김종서 사촌동생의 사위)로써 문과급제한 후 사재판서를 역임했다. 사재란 어량과 산택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서 오늘날 수산산림청과 같은 곳이다.

윤장은 계유정난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데리고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살목(화양리)으로 1453년, 입향(入鄕)한다.

묵와고가는 가야산줄기인 두무산과 오도산의 1000미터 넘는 산중에 위치해 있다.
화양리는 가야산 줄기인 달윤산 자락의 산골로, (당시) 윤장 외, 정쟁(政爭)의 화를 피하기 위해 여러 인물들이 이주해왔다. 이곳에 윤장의 얼과 파평윤씨의 정신이 서려있는 고가가 있다.

이름하여 묵와고가(黙窩古家)

묵와고가는 가야산줄기인 두무산과 오도산의 1000미터 넘는 산중에 위치해 있다.

묵와는 “침묵하는 옛집”이라는 뜻이다. 이 옥호 속에 담긴 의미는 뭘까?

파평윤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입향조, 윤장, 그는 1453년 계유정난을 피해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와 은둔생활을 하며 후손의 맥을 잇고자 노심초사 했을터!

아마 이런 심정 때문에 옥호를 <묵와>라고 하지 않았을까? 

묵와는 “침묵하는 옛집”이라는 뜻이다.
묵와고택은, 산비탈을 깎아 집터를 가꾸었다.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건물배치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사랑채·대문채·행랑채를 두고, 중간 단에는 안채, 곳간채를 설치하고, 가장 윗단에는 사당채를 두었다. 경사진 산기슭의 지형을 짜임새있게 활용한 지혜가 돋보인다. 과거에 비해 칸수는 많이 줄었지만 안채,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 사당, 방앗간채, 중행랑채, 곳간채 등이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섯 칸 대문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과 몸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안채에는 키가 작은 굴뚝을 설치하고, 사랑채에는 기단굴뚝을 설치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굴뚝은 은일한 삶을 살고자 했던 목와 고가 주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마루 밑에서 토방을 거쳐 기단까지 내굴길(煙道)을 내고 굴뚝 몸은 만들 생각 없이 기단에 연기구멍을 내었다.

윤장의 손자 윤자선

한편 윤장의 손자 윤자선은 1459(세조 4년)경에 거창군 남하면 살목으로 입향했다.

그 자손들이 지금의 남하면 양항리와 남하면 둔마리 안흥마을에 세거(이곳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삶)하게 된다.

윤장의 손자 윤자선. 자는 희무(希舞), 호는 화곡(華(谷)이다. 1450년 조선 세종때 북벌의 공을 세우고 성균관생원, 단성현감을 지냈다. 거창군에 사는 파평윤씨들은 윤자선을 거창 입향조로 모신다. 입향조(入鄕祖)란 어떤 마을에 맨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그 씨족의 조상을 의미한다. <입향조는 마을을 개척한 인물이자 동성(같은 성씨)마을의 시조가 된다. 동성들은 입향조를 큰 어른으로 추앙함으로써 자신들이 공동체적 동질성을 유지한다>

파평윤씨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다.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 윤신달이다. 신달은 아들 7형제를 두었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수십개로 분파된다. 파평윤씨 가운데서도 주로 판도공파, 소정공파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거창군에 거주하는 파평윤씨 문중 자료집에 따르면, 파평윤씨의 세덕(世德)을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성군 세종대왕께서는 척지진국의 위공을 세우신 우리 문숙공을 칭송하면서 ”파평윤씨 시조 태사공은 고려때 태조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한 공신이다, 지금도 파평윤씨는 고려때 대신 시조 태사공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나라에 충성한다, 가히 명문가이로다“

여기서 말한는 문숙공은 태사군의 후손으로서 고려 예종때 대원사를 지냈다. 문숙공은 30만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므로써 고구려 옛영토에 9성을 쌓고, 두만강 넘어 70리 땅, 선춘령에 고려경계비를 세운 인물이다.

근대사에 이르러 파평윤씨가 배출한 인물로는 윤석열 대통령, 윤관 대법원장, 윤봉길 의사,

윤경빈(독립운동가이자 김대중 전대통령 사돈), 윤동주 시인,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윤병세 전 외교부장관 靑谷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 등이 있다.

한편, 파평윤씨 거창 입향조 윤자선은, 합천군 묘산면 화양동에서 거창군 남하 시항(현재의 남하면 양하리)에 입향했다. 그는 윤장의 손자이다.

현감 이권의 따님이신 벽진 이씨를 아내를 맞이하고 1남3녀를 뒀다.

아들 윤경은 1495년(연산 1년) 문과에 급제하고 광주목사 사간원사간(종3품)에 올랐다.

거창 남하 시항에 둥지를 튼 윤자선의 호는 화곡(華谷)이다. 화곡은 지금의 심소정 터에서 장구(杖屨)했다. 장구란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이다.